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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16:26:32
kwsi
한국사회포럼2006-여성연합, 고민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국사회포럼2006 - 여성운동, 차이와 소통 그리고 새로운 미래 발제문2]

여성연합, 고민의 한가운데 서 있다  

                                                    김기선미/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국장

1. 여성연합의 진보성에 대한 질문들

- ‘진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계속적으로 구성되는, 가변적인 것이다. 70년대의 진보가 독재항거와 민중 지향성, 민주주의를 의미했다면, 2000년대의 진보는 신자유주의와 시장권력에 대한 저항, 일상에 파고들어 있는 미시적 권력에 대한 저항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보적이다’라는 선언의 진실성은 늘 그것이 선언되는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의해 판가름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운동이 진보적인가’, ‘활동가로서의 ‘나’는 진보적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맥락 속에서 순간 순간 되물어봐야 하는 과제이다. 이러한 질문을 놓치는 순간, 바로 ‘진보성’은 퇴색되기 시작한다.

- 개인적으로 여성연합 운동의 변화과정은 바로 ‘진보적 여성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대별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한다. 1987년 창립당시, 여성연합이 진보성을 性과 계급의 이중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민중 이슈를 중심으로 운동을 펼쳤다면, 1990년대 들어 여성연합은 성․가정폭력, 육아문제, 환경, 평화 등 단지 기층 민중 이슈만이 아닌, 일반 여성의 억압 문제를 진보적 여성운동의 과제로 설정하여 ‘진보’의 개념을 확장시켜왔다. 성․가정폭력이 범죄로 인정되지 않고, 성차별적 고용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아이를 맡길 마땅한 보육시설조차 없는 상황에서 당시 ‘법․제도 개혁’운동은 진보적 여성운동이 담당해야 할 ‘진보적’ 운동과제로 인식되었다. 이후 법․제도의 개선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비록 실행상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여성연합의 고민은 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여성들의 문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제도로 해결되지 않는 의식과 일상의 가부장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고민으로 넘어가고 있다. 지금 여성연합이 상정하는 우리가 담지해야 할 진보성은 ‘빈곤의 여성화’를 초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일상을 파고 들어 있는 시장권력에 대한 저항, 어쩌면 더욱 세련화되어 가고 있는 가부장적 권력에 대한 저항을 지역과 일상의 차원에까지 확대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 따라서 그 운동이 행해졌던 시대적 특성과 운동적 요구라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제도화를 위한 운동’은 ‘비진보적’이라거나 ‘성적 소수자’의 문제를 운동과제로 포괄하지 못하고 있어 ‘비진보적’이라거나 하는 식의 평가는 역사와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 각각의 운동이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 각각의 운동이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따라, 각각의 운동이 현재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진보’의 개념은 다를 수 있다. 그야말로 여성운동 내에서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두가 같은 ‘진보’를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진보’의 내용이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나온, 치열한 고민의 결과라면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운동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 내용은 정당하다. 그리고 통합적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진보’ 개념에 입각한, 다양한 ‘진보적 운동’이 펼쳐지는 것이 전체 사회의 변혁을 위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또한 여성연합의 운동구조는 회원단체의 현장성에서부터 이슈를 이끌어내는 구조이다. 이는 여성연합 운동의 실천력을 담보해주는 구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운동의 제한성을 만드는 구조이기도 한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여성연합의 회원단체로 들어오기 전까지 여성연합 운동에 여성장애인 운동이 포괄되지 못했으며, ‘성적 소수자’ 단체가 아직 여성연합 회원단체로 들어와 있지 않아 여성연합이 성적 소수자 운동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연합의 주요운동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연합 운동 구조의 특수성을 고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구조로서는 회원단체에 기반 하지 않은 채, 여성연합 사무국만이 특정 이슈의 운동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러한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여성연합 운동의 진보성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개인적으로, 누가 더 진보적인가에 대한 논쟁은 소모적이라 생각한다. ‘진보’에 대한 치열한 고민, ‘자기 정직성’이 중요하다. ‘진보성’은 논쟁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검증되는 것이다. 각자 갖고 있는 진보성의 개념에 부합하게 실천하고, 그 결과 여성들의 삶의 질이 더 향상된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가 더욱 살만한 사회가 된다면, 그 실천은 ‘진보성’을 담지 한 것이라 생각한다.

- 또한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대응하지 못한 문제를 진보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고, 이를 보수화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사회적 현안이 터졌을 때, 인력의 부족, 전문성의 부족으로 인해 제 때에 대응하지 못하는 사안이 발생하고 있다. 대응해야 하는 현안이 더욱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활동가들의 업무량에 비해 인력 충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지 않은 채, 대응의 부적절함을 보수화로 일치시키는 식의 평가가 활동가로서 마음 아플 때가 많다. 솔직하게 말하면, 활동가로서의 고충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매도될 때, 내가 왜 힘들게 운동을 하면서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아픔이 여성연합 활동가들 사이에 점점 깊어지고 있다.

- 여성연합의 활동가로서 갖고 있는 책무는 ‘여성연합이 스스로 무엇을 진보적이라 규정하는가’, ‘지금 현재 진보적 여성운동이 해야 할 실천은 무엇인가’를 회원단체와 끊임없이 고민하고 소통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여성연합 안에 스스로의 진보성에 대한 ‘의심의 구조’를 상시화하는 것이다. 연합체인 여성연합의 특성상, 진보에 대한 상이 회원단체 간에 단일하지 않고 완전히 단일한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진보성’의 공통분모를 계속 찾고, 공통분모에 기반 한 활동을 통해 우리의 진보성을 실천하고, 다양한 진보성이 발휘되도록 열어놓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활동가 포럼’ 등을 통해 회원단체 활동가들과의 논의모임을 일상화하는 방안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각종 여성연합 내 수련회와 회의구조에서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려 하고 있다. 여성연합 사무국 10여명의 인력으로 닥쳐오는 일을 쳐내기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지만, 고민의 줄을 팽팽히 하려는 시도를 힘겹게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2. 여성연합에 제기되어 온 문제들, 여성연합의 고민들

(1) 제도화의 위험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 여성연합에서 제도화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공론화 한 것은 1999년 정책수련회 때부터 인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회원단체들의 정부 프로젝트 비율이 높아가고, 상담소 활동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이 시작되면서, 그리고 정부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고 단체 출신들이 국회에 진출하거나 관료로 진출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1999년 당시 수련회의 논의 결과, 이루어진 동의는 ‘진보적 여성운동은 제도로서 여성정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 각종 위원회 등 제도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것은 부분적인 전술로 채택하되, 제 3섹터인 운동세력으로서의 자기 위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 활동에 대한 감시와 대안제시, 여성권익 옹호를 위한 대변, 정부 활동의 대상을 벗어난 대안사회 실험을 위한 운동 등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역 여성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턱 낮은 운동방법과 과제의 개발 등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의 논의과정에서도 국가로부터의 독립성을 획득하기 위한 재정자립 방안, 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적 운동에 대한 논의 등이 회원단체와 이루어져왔다.

- 우선 ‘제도화’의 문제를 논의할 때, ‘제도화’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제도가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중대함을 생각할 때, 제도화 그 자체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90년대부터 본격화된 제도화 운동이 여성의 삶에 미친 긍정적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또한 지금까지의 제도화가 불완전하고 시대적 변화에 따라 더 나은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 시기에도 제도화는 여전히 중요한 운동 과제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제도화’의 성과에 운동이 참여하는 방식, ‘제도화’를 운동이 통제하는 방식이지 ‘제도화’ 그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여성연합에서는 어떻게 ‘제도화’를 운동이 통제할 것인가, ‘제도화’가 곧 ‘운동의 제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행시켜 왔다.  

- 이러한 고민은 ‘국가 정책 과정에의 참여 및 개입’과 ‘재정 의존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로 진행되어 왔다. ‘국가 정책 과정에의 참여 및 개입’은 여성연합이 ‘성주류화’를 주요 운동방향으로 설정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국가의 각 정책 분야에 여성적 시각을 도입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곧 정책 과정에의 개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책과정에의 개입이 곧 운동의 자율성과 비판력의 상실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 정책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정책과정에 대한 참여를 회피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정책과정에의 참여가 운동의 자율성과 비판력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안은 결국 현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가와의 정책논의, 정부에 대한 정책 건의과정을 통한 문제해결에 국한된 방식은 운동을 단지 정책 보고서와 정책제안을 위한 문서수발 차원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현장을 갖고 있는 회원단체로부터 정책요구를 모아내고, 회원단체와 함께 이를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정부를 압박하고, 정부가 받아들인 정책 수준을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수위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책과정에 참여하여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운동의 과정 속에 일부분으로 위치 지워져야 한다.

- 이러한 고민 속에서 여성연합 운동의 ‘속도’에 대한 성찰이 있어왔다. 비록 더디 가더라도, 대중들과의 공유과정, 지역에 기반 한 운동으로의 조직과정을 보다 철저히 하자는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동안 속도전에 익숙한 우리 스스로를 바꾸는 작업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충분한 소통 없이 빠르게 달려가려고 하는 스스로의 관성을 바꾸는 것이 ‘제도화’를 운동이 컨트롤하고, ‘여성운동의 제도화’라는 위험을 피해가는 길이라는 인식을 만들어가고 있다.

- 제도화의 문제의 한 축인 ‘정부에 대한 재정 의존성’ 문제는 운동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고민되어 왔다. 그러나 기부 문화 자체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여성운동의 경우 더욱 후원구조가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부 프로젝트에 대한 의존성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성연합의 경우, 정부 프로젝트 비율이 전체 재정의 30%를 넘지 않도록 하며, 운동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업만을 프로젝트로 진행한다는 원칙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회원단체들의 경우 프로젝트에 대한 의존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타계하기 위해서, 더욱 지역화, 대중화에 집중하여 회원 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넓혀왔다. 그러나 지역화, 대중화가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과제이기 때문에 회원단체의 재정적 취약성은 운동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상담소의 경우에, 재정적 지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이루어져 정부에 의한 간섭과 통제가 더욱 심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이와 관련하여 상담소의 운동방향에 대한 논의가 관련 단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 그동안 여성연합에서 진행되었던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논의결과, 최근 여성연합은 ‘지역여성운동 강화’ ‘대안적 사회를 위한 운동’을 본격화함으로서 제도화의 위험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2005년 ‘지역여성운동센타’를 만들어 지역운동의 고민 나누기, 지역 운동 매뉴얼 및 운동모형 개발, 지역운동 지원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직 지역여성운동의 풀뿌리 기반이 매우 취약하고 여전히 지역내 성주류화 전략이 필요한 상황에서 지역 회원단체들도 풀뿌리운동으로 조직방향을 선회하기에 어려움이 많지만, 여성연합은 지역여성운동 조직에 대한 지원을 통해 풀뿌리운동을 튼실화 하기 위한 지원을 진행하려 하고 있다. ‘대안사회운동’은 2000년 ‘대안사회연구소’를 통해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려 했지만, 여전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여성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는 가능하다’ 워크샵 등을 진행하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운동 과제와 틀을 뛰어 넘어 대안사회 창출을 위한 운동을 고민해야 한다는 공감대 정도만을 형성하고 있는 단계이다.

- ‘제도화’의 위험을 피해가기위해 ‘지역여성운동 강화’ ‘대안사회실현을 위한 운동’ ‘대중과 더디더라도 함께 가는 운동방식’등에 대한 시도가 있지만 아직, 고민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실천을 통해 도출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성연합 내에 이러한 고민을 실천으로 풀기위한 운동의 방향 선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90년대부터 시작된 ‘제도화’ 운동이 당시의 맥락에서 여성운동의 ‘진보적’ 과제였다면, 200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의 과제는 ‘제도화’를 뛰어 넘어 ‘일상에서 대안을 창출하는 섬세한 운동’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2) ‘새판짜기’를 위한 ‘끼어들기’, 일상의 정치화를 어떻게 만들것인가
- 여성연합 내에서 정치참여 방식에 대한 고민, 구체적으로, ‘끼어들기’와 ‘새판짜기’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여성할당제가 양적 확대에만 몰입된 채 ‘새판짜기’를 위한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정치체제에 타협하거나 이를 유지시키는 정당성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 속에서, ‘여성의 힘 갖추기(empowerment)’는 기존 정치의 ‘새판짜기’를 지향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1999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수련회). 이러한 논의 속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2000년 총회를 통해 대표와 산하 단체 대표들의 임기 내 정치 진출을 막는 내규를 의결함으로써 ‘끼어들기’와 ‘새판짜기’ 중 후자에 더 비중을 둔다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모호하며 현실 정치에 대한 ‘끼어들기’ 없는 ‘새판짜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끼어들기’ 전략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 또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 이전의 정치참여 논의가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면, 2004년의 총선을 앞두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참여 전술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호주제폐지와 같은 여성 운동계의 오랜 숙원이 16대 국회에서 가부장적인 정치권의 벽에 막혀 실패하는 등 정치권의 ‘새판짜기’ 없이 여성운동 과제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의 ‘새판짜기’는 새판을 짤 수 있는 의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는 여성이 국회에 진출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누가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 진보적 여성운동이 ‘새판짜기’를 위한 ‘끼어들기’ 전략을 감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성연합은 2003년 동안 각종 내부 수련회와 이사회 등의 회의를 통해 ‘끼어들기’ 전략의 수위를 논의했고 그 결과 그동안 금지했던 단체장의 정치진출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정관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 결국 이러한 논의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와 보수 인사가 망라된, 개인적 인사로 구성된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이하 맑은넷)의 구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맑은넷은 2004년 1월 공개추천과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친 101명의 여성후보 명단을 발표하였고, 각 정당에 후보 공천을 요구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과 17대 여성 국회의원 당선자는 전체 39명으로 여성국회의원 비율 16대 5.4%에서 두 배가 넘는 13%로 늘어났고, 전체 여성 당선자의 54%가 맑은넷 후보에서 선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 맑은넷의 활동은 아직도 여성운동 내에서 많은 찬반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맑은 넷 운동은 여성 국회의원 비율 5.9%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새판짜기’를 위해서는 일정한 양의 확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성 할당제’를 주장하는 맥락도 이와 같다. 우리의 기준에 부합하는 ‘진보적’ 여성만을 국회에 진출시키고자 한다면, 과연 그 소수의 여성이 국회에서 새판을 짤 수 있는 정도의 세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개인적으로, 당시 여성 국회의원 비율 5.9%의 상황은 여성 국회의원의 양적 확대를 1차 전략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양적 확대라고 해서, 맑은넷으로 진출한 여성국회의원들의 질이 전혀 보장되지 못했다고는 평가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를 개혁할 수 있는 정도의 여성을 선정했고, 이념적 성향과 상관없이 성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성을 보일 수 있는 여성들이 선정되었다. 최근 최연희 국회의원의 기자 강제 성추행 사건 때 한나라당 여성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최연희 의원의 사퇴를 주장한 것과 같이, 정치적 보수성을 갖고 있으나 젠더 의식 측면에서는 국회 내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다는 점은 평가되어야 한다.

- 여성 국회의원이 5.9%에서 두 배가 넘는 13%로 확대된 것은 분명히 성과로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과거 여성의 정치 참여가 정당에 의해 일부 간택되어가는 방식이었다면, 맑은넷 운동을 통해 운동적 차원을 통한 집단적 ‘끼어들기’ 전략을 택했다는 것의 의미도 인정되어야 한다. 이는 운동적 영향성을 확보하기 위한 끼어들기 전략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 그러나 ‘진보’의 개념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듯, 정치전략도 마찬가지이다. 여성 국회의원 13%의 상황에서 2004년과 같은 양적 확대 전략을 되풀이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이번 지방자치 선거에서 전국차원의 ‘맑은넷’을 다시 구성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판단에서이다. 이제는 비례대표의 확대와 정당의 여성할당에 힘입어 적어도 10% 이상의 여성진출은 거의 확보해 놓은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여성을 진출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운동과제이다. 정치적 진보성과 함께 여성운동의 진보성을 담지하고 있는, 새판을 짤 수 있는 여성을 정치에 입문시키기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 다음 총선에서 본격적으로 ‘새판짜기’를 구체적 운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아이템 개발이 필요하다.

- 또한 정치의 개념을 확대하여 지역정치와 생활정치의 공간 속에서 여성이 주체적 운동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지역․생활․일터 등에서 대항적인 정치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부들은 지역의 교육, 환경, 공공서비스 등의 이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과 생활에서부터 양성 평등적인 문화, 생태적 생활양식, 대안적 소비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기업이 남성에게 육아와 가정생활 참여를 위한 시간을 부여하도록 촉구하는 등 주부의 입장에서 생산영역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표출하여 공․사의 분리에 대해 비판하고 공․사의 재 개념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과 함께 기업이 ‘보살핌과 돌봄’ 활동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남녀 노동자 모두의 육아와 가정생활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도록 강제하는 운동, 기업의 생산방식이 보다 친환경적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여성들의 조직화를 통해 지역과 생활, 각 부문을 저항 정치의 공간으로 재개념화 함으로써 제도권에 대한 개입을 뛰어넘는, 보다 체제 변형적인 진보적 여성운동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 차이에 기반 한 연합운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 여성연합의 연합체 운동 방식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다. 한국의 경우 오랜 독재로 국가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 이에 대한 산발적 저항으로는 운동이 생존할 수 없었다. 여성운동 또한 198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연대 운동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여성노동자생존권대책위원회’ ‘부천서 성 고문 대책위원회’ ‘KBS시청료 거부 여성연합’ 등의 연대활동이 이어지다가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으로 탄생하게 된다.

- 문제는 진보적 여성운동의 역사적 산물인 ‘연합체’ 운동 방식이 현 시기에도 진보적 여성운동의 방식으로 유용한가일 것이다. 최근 연합체 운동에 대한 비판들- 관료성, 내부 민주주의의 문제, 차이를 약화시키는 연합 구조의 문제-이 제기되는 것도 그 타당성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물론, 연합체 운동이 갖고 있는 단점은 있다. 이에 대한 평가와 대안 모색은 필요하다. 그러나 연합체 운동이 갖고 있는 단점에 묶인 나머지 그 장점마저 인정하지 않고 해체하려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연합체 운동의 장점은 운동의 집중성과 강한 영향력이다. 한국과 같이 국가의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에서, 그리고 가부장적 시스템이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합체운동이 갖고 있는 운동의 집중성과 영향력을 섣불리 해체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물론, 일상을 전복하는 운동, 차이에 기반한 운동, 해체와 연대를 반복하는 느슨한 네트워크의 운동방식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의 변화를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는 근대와 전근대, 탈근대가 공존하고 있는 소위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갖고 있는 사회이고, 이로 인해 운동의 방식 또한 연합체 운동과 네트워크 방식의 운동이 모두 공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최근의 연합체 운동에 대한 비판과 네트워크 운동의 새로운 유형 창출은 결과적으로 여성연합이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왔다. 연합체로서 여성연합 운동이 운동의 영향력 측면에서는 강점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회원단체들이 여성연합이 갖고 있는 대표성에 가려지고, 회원단체들의 차이가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빠른 운동의 속도로 인해 회원단체 활동가들과 운동방식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공감대 형성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운동이 진행되는 문제도 있었다.

- 지금도 여전히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연합체 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여성연합은 2004년부터 조직 내에 네트워크적 방식을 일부 도입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여성연합의 노동위원회, 성․인권위원회, 성인지예산특별위원회 등을 해산하고 관련 운동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회원단체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자체 필요에 의한 논의를 통해 운동을 진행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이슈가 발생했을 경우, 관련 사안을 다루는 회원단체가 먼저 대응하고, 연대의 필요성이 있을 경우 여성연합 전체 차원으로 대응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과연 성공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2004년과 2005년 네트워크 방식의 운동을 일부 채택했지만, 회원단체들간의 자율적인 네트워크가 생각보다 활발히 전개되지 못했다. 개별 단체들은 단체별 과제에 집중하다보니 관련 단체별 네트워크 구조를 통해 전체 운동적 관점에서 필요시 되는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났다. 네트워크 구조로 전환한 운동과제의 경우, 여성연합 내에 대응구조가 없다보니 관련 사안이 긴급히 발생했을 때 네트워크 구조의 느슨함과 느린 대응력으로 인해 결국 여성연합의 의견이 표출되지 못하는 상황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러한 내부 변화가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과 인권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 여성연합이 대응하지 않았다는 오해가 증폭되기도 했다.

-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이는 결국 여성운동의 대응력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역의 작은 단체들의 경우, 관련 이슈가 네트워크 체계로 변화함으로 인해 여성연합으로부터 받아야 할 정책적 지원이 약해지면서 정책역량의 약화 문제를 제기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그 결과, 2006년에는 회원단체들의 요구에 의해서 ‘팀’의 형태로 여성연합내의 논의 및 사업 실행 구조를 만들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

- 따라서 연합체의 해체만이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저항의 대상은 결코 해체하지 않고 강고한 상태에서 섣부른 해체는 운동력의 상실로 귀착될 가능성이 있다. 작은 생활개혁운동으로 들어간 일본의 여성운동은 현재 일본의 군국주의와 보수화에 저항할 연대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현재 여성연합 운동은 연합체의 장점과 네트워크의 장점을 차용하는 새로운 조직 유형을 구상중이다. 개인적으로 이를 십자가 모형(CROSS MODEL)이라고 생각한다. 즉, 수직적 연결망을 통한 통일성과 차이에 기반 한 수평적 연결망을 동시에 짜들어가는 구조이다. 연합체의 운동의 집중성을 잃지 않으면서, 조직 내부의 열린소통과 민주적 구조 마련, 차이에 기반 한 연대를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가 중요한 고민지점이다. 2005년 여성연합은 ‘여성운동지원센타’를 통해서 조직 내 소통을 좀 더 적극화하려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다양성과 차이에 기반한 연합체 운동’이라는 국제적으로도 독특한 운동모형을 꿈꾸고 있다.

(4) 현재 여성연합 운동의 화두, ‘빈곤의 여성화 극복’
- 여성연합의 이슈 중 최대 고민사항은 ‘빈곤의 여성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다. ‘빈곤의 여성화 극복’은 최근 몇 년 동안 여성연합의 핵심사업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빈곤의 여성화’가 일국적 차원만으로는 극복되기 힘든 문제이고, 정부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에 비해 운동의 결집이 어렵다는 점으로 인해 그 해결책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여성연합이 비정규직 관련 법 개정안을 2000년도에 청원했고,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법 개정운동을 전개했지만 뚜렷한 해결책과 실천방법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최근까지도 ‘빈곤의 여성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운동적 무력감과 자괴감이 여성연합 활동가들 사이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 2006년 다시 핵심 사업으로 ‘빈곤의 여성화 극복을 위한 운동’을 선정하고, ‘빈곤의 여성화해소운동본부’를 구성하였다. 노동팀도 2006년 다시 구성되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실태조사와 차별극복을 위한 운동을 주요 방향으로 설정했고, 빈곤팀에서도 빈곤정책에 대한 성인지적 분석과 빈곤 여성을 위한 양질의 사회적 일자리 확대, 사회보장정책 마련 등을 위한 운동을 진행할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그동안 빈곤의 여성화 극복을 위한 운동이 비정규직 관련법의 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면, 이제 법의 한계를 벗어난 다양한 운동을 펼쳐보려 하고 있다.


3. 기타 많은 고민들

이외에도 여성연합은 여전히 많은 고민 지점을 갖고 있다.
대중성과 진보성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가족 중심주의에 묶이지 않고 현실 가족을 변화시키며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운동방식은 무엇인가, 여성주의적 국제연대 방식은 무엇인가, 활동가들의 전문성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 활동가들의 재충전과 복지를 위한 체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등등 많은 고민을 안고 있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본다면 결국 이러한 고민들은 실천 속에서 풀릴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실패하면 그 실패에 대가를 치루고 배워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만이 진보적 여성운동이 진보성을 계속 담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끝으로 오늘의 토론이 각자의 차이에 대한 인정과 존중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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